‘사고’와 ‘사라짐’의 예술이라는 문지방
이웅철의 미디어 아트
이영철
(독립기획자. 2회(1997) 광주비엔날레 기획자)
들어가며
1993년 백남준이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한스 하케와 함께 초청되었을 때, 한케의 ‘GERMANIA’를 전문가들은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조각으로 보아 찬사 일변도였지만 하케가 조각 부문 대상을 받은 건 아니었다. 백남준의 그 많은 비디오 로봇들은 조각에서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당시에 조각 부문 최고 상을 루이즈 부르주아나 일리야 카바코프가 수상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로버트 윌슨에게 돌아갔다. 후문에 부르주아가 크게 실망했다고 당시의 뉴스는 전한다. ‘엘바 강의 난파선’을 연상시키는 한케의 국가관 바닥 찢기의 설치 작업이 조각 개념의 실종 신고를 한 셈이 되었고 비디오 조각은 기술 분야의 작업으로 보였을 뿐 조각의 어젠다는 비평과 전시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물며 동시대 공연의 대가인 로버트 윌슨의 전시가 아무리 감동적이었다 한들 조각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웬 일인가. R. 크라우스의 ‘조각 개념의 확장’이라는 에세이의 관점 이동에 따라 조각 개념은 비물질, 비장소의 용어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디지털 혁명으로 조각 개념의 재규정은 별개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미디어 미학 내지 존재론이라 할 수 있을 이웅철의 작업과 그의 형상화 논리는 기존의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의 개념적 위상을 재검토하는 문을 열어준다. 20세기 미술의 원리와 방식을 재검토하는 논리적인 작동으로서의 그의 미디어 아트는 시각 예술에서 대상 규정과 주제의 표현이 아니라 비판적인 시각성 영역의 문제틀을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웅철의 미술 작업의 기본은 컴퓨터 안에서 3D 프린터와 정보를 구체화할 수 있는 물질적 프레임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시뮬레이션 놀이’의 상황을 만든다. 디지털(수학)로 작동되는 영상 그래픽과 3D 모델링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결코 아니라 자신의 사고와 지각의 인공보철물로 삼아 실재와 가상, 물질과 비물질, 가시성과 비가시성에 새로운 초점화를 제시한다. 정보(데이터 값, 비물질, 무중력)를 기반으로 한 그의 ‘미디어 놀이학’은 세계 질서의 변동을 야기한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들(전쟁, 테러, 재해 등)의 사실성에 기초했다. 이 경우에 서사는 외관으로 드러나지 않고 철저히 조율된 기하학적 형태와 패턴과 형식‘의 장치들 속에 내재해 있다. 미술이 누구나 사용하고 참조할 수 있는 문제틀로서 제안될 필요성은 사물들, 도구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요한다.
그의 작업은 20세기 초의 상상력에서는 예측하지 못했지만 디지털 기술이 당시 시작된 탈물질화의 급진적 완성을 어떻게 가능케 했는지, 그리고 이 완성이 어떻게 흔들리고 미완이었는가의 과정을 접합, 해체, 재구성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업이 점점 고도화하고 치밀해져 간다. 보치오니, 가보, 비올라, 백남준을 다시 읽어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 준다. 이는 현대 세계에서의 이미지의 부상과 인지적, 지각적 방향을 잡는 방법으로서 시각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맥락의 제안으로, 그가 보여주는 시각성은 세상이 이미지로 펼쳐진다는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 안에서 우리가 이미지로 생각한다는 개념을 어떻게 전달하고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전쟁, 테러, 재난이라는 사건적 국면을 포함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와 돈의 흐름이 많아지면서 시각성의 더 많은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처럼, 시각성은 물질적 존재로서 세상을 탐색하는 데 필요한 은유이자 이해의 방식이 되었다.
통섭
이웅철이 작가로서 활동을 개시한 시기는 모더니즘의 ‘환원’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다원예술’(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보수화된 개방성)의 제도적인 지원 속에서 ‘확산’이 예술 활동의 주도적인 힘을 발휘할 당시였다. 하지만 <소멸의 방향, 2010>(학부 졸업 작품)이후 이웅철의 예술의 ’항해‘는 다원예술과는 구분되는 ‘컨실리언스’의 의미에 보다 부합하는 성격으로 성장해온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에 따르면 컨실리언스의 번역어에서 통(統)은 '큰 줄기'라는 뜻으로, 섭(攝)은 '잡다'라는 뜻을 합친 의미로 제시한다. 큰 줄기가 없이 여러 다른 분야들 간의 접합을 가리키는 크로스 오버, 다학제간, 혼종성 등의 단어는 통섭과는 차이가 있다. 이 시대의 가장 다재다능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얀 파브르는 무용, 연극, 시각예술, 글쓰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통합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지식의 도약’을 이루기 때문에 스스로를 컨실리언스 예술가라 부른다. 지식의 도약이 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새롭고 어려운 기술적인 도구들이 등장한 시대에 예술의 역할이 통섭적 지식의 산출에 필요한 영역임은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큰 줄거리가 없이 ‘혼종성’ 만을 추구하는 작가는 일시적인 다원예술가일 수는 있어도 통섭 예술가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통섭적 사고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 두 가지를 포함하여 겉보기에 사뭇 다르고 이질적인 것이거나 심지어 서로 반대되는 지식(입장) 간의 보다 깊은 연관성을 탐구한다.
클로킹
이웅철 예술의 출발은 ‘클로킹’이다. 무언가를 숨기거나 망토나 변장으로 가리는 행위이다. 6미터 크기의 대형 스탤스기(소멸의 방향, 2010)를 건물 로비의 천정에 걸었던 행위에서 비롯한다 클로킹은 이론상으로는 모든 전자기파 영역에서 ‘물체의 굴절률이 진공 상태일 때와 같아지면 물체를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그래서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클로킹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스텔스’와 ‘광학 위장’으로 나뉜다. 이 두 가지는 이웅철 예술의 핵심으로 그가 관심을 가졌던 비등방성이란 용어와 관련이 있다. 메신저 대화를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After Effect, 2022>작업을 할 때 비등방성(非等方性: anisotropy)을 고민했습니다. 이는 Surface 연작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가 잘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물의 요철에 빛이 맺히는 형상으로 우리는 실물을 시각적으로 해석한다고 판단했었습니다. 빛은 개별적인 존재보다 지각의 한 요소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빛이 구체적인 세계를 비추고 또한 망막에 있어서 빛의 감각이 공간 감각과 더불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빛은 자체를 숨긴 채 모든 사물을 드러내 줍니다. 본다는 것은 빛을 인지하는 것이고 빛이 반사되는 정도를 통해 사물이 어떠한 재질로 구성되어 있는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광학적 비등방성으로 정의할 수가 있는데, 컴퓨터 그래픽에서 비등방성은 사물에 사실감을 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최근의 3D 기술은 자연물이나 인공물이 갖는 시각적 특성을 분석하여 실재의 것과 같은 수준에 이르렀고 영화나 게임의 CG는 이미 현실 이상의 현실감을 표현하게 되었어요. 가상과 실재의 이미지는 시각적인 정보로서 동일한 수준이 된 것입니다.”
물과 불
97년 국내에 처음 선을 보였던 빌 비올라의 <물> <불>의 비디오 설치 영상은 사운드와 더불어 에너지의 근원을 상기시켰다. 에너지가 클수록 비트가 더 빨리 바뀐다. 흙, 공기, 불, 물은 결국 모두 에너지로 구성되지만 이들이 취하는 다양한 형태는 정보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한 일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근원에 있는 것은 불도, 따뜻한 숨도, 생명의 불꽃도 아니다. 근원에는 정보, 단어, 지시문이 있다. 비유를 원한다면 불과 불꽃 그리고 숨을 생각하지 마라. 대신 결정질 판에 새겨진 10억 개의 이산적 디지털 기호들을 생각하면 된다.
이웅철은 물과 불을 다른 맥락으로 가져와 발명가가 된다. 가상과 현실, 물질과 비물질(데이터, 정보)의 구분이 점점 모호한 ‘혼합 현실’은 양자 물리의 세계로 디지털 세계의 연금술(마법이자 중세의 화학)로 통한다. 작가는 3D 프린팅, 크로마키, 쿼터니언 등 오늘날 SF 영화에서 많이 사용되는 기법을 독학으로 연구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견실하게 구축해 간다. 그는 말한다. “3D 그래픽 작업을 장시간 지속하다 보면 현실의 사물이나 풍경이 가상의 환경처럼 보이는 순간이 생긴다. 가상의 세계에 머물러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상은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물의 겉면, 2020>은 이렇듯 현실과 가상이 분리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Surface> 연작 중 한 작품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출과 일몰의 풍경을 담은 <물의 겉면>은 그래픽으로 만든 바다의 이미지로서 그 본질은 데이터 값일 뿐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빛과 천천히 움직이는 파도는 시공간의 질서를 뒤집어 버린다.” <불의 표면, 2021>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건물 안에 화재가 발생한 위기의 정동을 유발하는 작업으로 표면적 효과가 아닌 심리, 지각적 충격을 가져온다.
사고(accidents)
정보와 샤머니즘을 동전의 양면으로 본 백남준이 뒤샹 이후 개념주의 미술과 그 정치적 권력 투쟁를 인정하지 않고 미켈란젤로의 성모나 천장화를 전자 조각과 전자 회화로 대체해 버린 것은 시각예술의 큐레이터들, 비평가들의 눈에 단지 영상 조각이나 영상 벽화로 보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웅철은 이 논쟁적인 그러나 굳이 자신의 발견이나 발명을 모두 공개할 이유가 없는 전선의 선두에 있는 예술가 중의 한 명이다. ‘사고(accidents)’는 이웅철의 예술에서 ‘큰 줄기’를 만들어온 중요한 개념으로 그의 작업 기간이 고작 10년이 채 되지 않으나, 중동 전쟁들과 테러, 자연재해와 인재가 모호해진 국면 전체와 불가분 연관돼 있다. 사고란 용어는 복잡하고 모호한 개념으로 단순히 파국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웅철은 오히려 그것을 지각과 인식의 차원으로 가져와 현실과 가상, 생명과 무생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을 탐구한다. 이런 관점은 프랑스의 독창적인 사상가 폴 비릴리오가 [소멸의 미학]에서 기술하였던 관심과 상당히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하였다. “철학자에게 물질은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반면, 사고는 상대적이고 우발적인 것이다. 사고는 물질, 제품 또는 최근에 발명된 기술적 대상에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0년 전 발생한 챌린저 우주왕복선 사고가 그렇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고를 피하는 것이 과학자와 기술자의 의무이다...선박=선박 사고, 기차=기차 사고, 비행기=비행기 추락 등 특정 재난을 일으키지 않고는 어떤 기술적 대상도 개발될 수 없다. 따라서 사고는 기술 진보의 숨겨진 얼굴이다...지금 전 세계적으로 통신 및 텔레매틱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가속도는 전자기파의 속도인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특정 지역의 국지적 재난이 아니라 지구 전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기술과 관련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로벌 재난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이 새로운 사고에 대한 개념은 종말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오히려 통신의 상호 작용성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방사능의 파괴적인 영향을 재현하는 이런 종류의 재앙을 합리적으로 예상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다. 체르노빌을 생각해보라.” (비릴리오와 쁘띠의 대화, 1999: 92-3)
그의 가장 초기작인 <무감각의 병리> 시리즈는 늘 어디서나 보게 되는 TV와 인터넷 보도 기사를 통해 막상 지금 벌어진 새로운 참사 사건들 - 전쟁, 테러, 재난 등 - 을 마치 지나가버린 일처럼 보게 되는 ‘데자뷔’ 경험을 다룬 작업으로 현대적 시각 경험의 특성을 기하적 형식의 구성Configuration으로 실험하였다. 작가는 보여지는 이미지와 정보의 과잉 및 편집 프레임의 차이들 속에서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기 어려워진 미디어 사회의 난점을 성찰하면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말처럼, 특정한 날짜에 벌어진 세계 여러 사건 현장의 보도 이미지를 컴퓨터의 정보 처리의 눈으로 환원하는 디지털 화면 영상으로 바꾼 뒤 포토샵에서 컴퓨터의 필터링을 거쳐 기계적으로 단순화시키고 해체한다. 다음으로 수정화 단계에서 만들어진 다각형을 입체로 구성한다. 이때 포토샵에서 나온 형상을 굴절 각도에 따른 착시의 연출과 조형성을 위해 형태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post - Truth 시대에 심각한 재난 사태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인 정보 홍수에 길들여진 무감각 상태의 병리에 비평적으로 반응하는 예술이다.
이웅철이 사용하는 디지털 색상은 알고리즘 코드에 의한 것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발명이 시작된 컴퓨터라는 죽음의 기계가 선출하는 알고리즘 색상이 너무도 환상적이라 인간과 기계의 더 크고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혁명적이고 환각적인 색조로 여길 만한 것이다. 이웅철은 색채의 산업적 혹은 실험실 역사에는 관심이 없지만, 디지털 색채가 전통적인 색채의 시각화 현상과 다르게 고도 기술화(사이버네틱스, 정보이론과 수학)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미학의 역사만큼이나 컴퓨팅의 역사의 일부이다.
바퀴 + 회로 = 화로(알, 변환 기계)
<이상한 정원>(예술의 전당, 2022)에서 보이는 거대한 알, 그리고 회전하는 구는 세계 창조와 현재 디지털 생성 문화의 관계를 은유하는 것으로 그는 전시의 배경을 피타고라스의 뇌와 컴퓨터 공학의 연결 지점을 스캔하여 조형적으로 무대화하였다.
그런데 왜 동일한 제목인 <이상한 정원, 2022>의 동영상 속의 회전구가 설치 작품 안에서는 커다란 타원구의 형태인가. 생명의 알은 태양이 아니라 차가운 달에 비유되지 않는가. 작가는 필자와 대화에서 말했다.
“그 작품은 <변덕스러운 달>(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22)이란 전시의 일부였어요. 전시에 ‘달’을 제목으로 지은 것은 두 가지 의미였는데 하나는 손으로 소조를 할 때 주물주물 거리면서 구에서부터 형상이 시작되기도 하고 그게 인류가 달을 보면서 상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변덕스러운 달‘은 SF소설 제목인데 저에게 의미 있는 소설가의 작품이어서 거기서 인용한 겁니다. '마나(Mana)’라는 초자연적 개념을 처음으로 소설에 적용한 작가에요.”
그는 SF 소설의 미국 작가 래리 니븐으로 1973년에 발표한 소설집 <변덕스런달(Inconstant Moon)>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제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 유명한 발코니 장면에서 인용한 "오, 달은 맹세하지 마세요."(2막 2장 2절)에서 온 것이다.
줄리엣 : 날 사랑하나요?
당신이 그렇다고 말하면 당신 말을 믿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맹세한다면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오, 신사다운 로미오,
날 사랑한다면 진실되게 말해줘요.
로미오 : 아가씨,
은빛을 띤 그대의 축복 받은 달을 두고 맹세하건대,
이 모든 과일나무 꼭대기에 대고,
줄리엣 : 오, 불변(th’inconstant)의 달, 맹세하지 말아요.
궤도를 따라 돌면서 매달 변하는 달은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변덕스럽지 않다면요.
로미오 : 그럼 뭘 두고 맹세할까요?
줄리엣 : 맹세하지 말아요.
정 원한다면, 내가 숭배하는 기품있는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세요.
그럼 당신을 믿겠어요.
(참조: ‘불변(th'inconstant)'이란 표현은 셰익스피어가 살던 당대에는 달이 별들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반구의 천공에 별들처럼 박혀 있다는 프톨레마이우스 천체관을 반영한다)
미국의 SF 소설가 래리 니븐의 <The Magic Goes Away, 1976>는 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발간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웅철은 헨리 무어의 조각을 연구하던 중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인들을 통해 전수되어온 ‘마나(mana)’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래리 니븐의 소설에서 이러한 마나를 마법사들이 소모하는 에너지로 최초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은 ‘마나’로 구동되는 기능적인 마법을 기반으로 한 아주 오래전 문명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후속작 <The Burning City, 2000>에서 지구에는 마나가 거의 소진되어 한정된 양만 존재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 생물, 신들은 결국 ‘신화화’되고 말았다는 가정이 이 소설의 전체 이야기에 깔려 있다. 지질학적으로 석탄기에 형성된 석유는 엄청난 에너지이자 생명체로 마나의 상징이다. 1973년 석유 파동을 겨냥해 현대 문명이 고정 자원에 의존하는 것을 겨냥한 매우 명백한 비판적인 알레고리이다. 소설 속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된 장치는 ‘마법사의 바퀴’로, 단순한 형태의 구리 원반에 두 가지 주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무한히 빠르게 회전하게 하는 주문이고 다른 하나는 마나가 있는 한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게 만드는 주문이다. 그 마법의 바퀴가 이웅철의 동영상 <이상한 정원, 2022>에 등장한다.
작가는 익명적 존재가 되어 자신의 두 다리를 3D 스캔을 이용해 제작한 후에 설치 작업과 연결해 스스로 무대 위의 마법사(연금술사)를 연출한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모든 것을 분쇄하는 ‘마법사의 바퀴’가 프랙탈 이미지를 형성하며 맹렬히 돌아간다. 이 바퀴는 ‘쿼터니언 줄리아’라는 프랙탈로 드론이 작동하는 수학의 세계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고 동명의 설치작품 <이상한 정원>의 알은 ‘화로’의 역할을 한다. 화로는 연금술에서 불의 기능을 나타낸다. 불은 물질을 정화하여 현자의 돌로 바꾸어 주며 이는 열기와 불꽃의 요소로서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철학적 작업 과정에 처음부터 개입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이상한 정원>에서 연금술의 도가니인 알은 ‘현자의 돌’이 처리되는 용기(vessel)이다. 알 모양으로 설계된 화로는 생물학적 잉태와 정신적 소생(자궁으로의 회귀)이 일어나는 곳으로, 마법사들은 이 화로를 만물의 근원으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인 단일체, 곧 우주의 알과 동일시했다. 속이 텅 빈 채 날아가는 화려한 색상의 <텅 빈 돌, 2022>은 ‘현자의 돌’을 은유한다. 현자의 돌(라틴어: lapis philosophorum), 철학자의 돌(Philosopher's stone) 또는 마법사의 돌(Sorcerer's Stone)은 전설 속에 존재하는 물질로, 귀한 금속(卑金屬)을 신성한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돌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때로는 사람을 젊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생명의 묘약). 오랫동안 서양의 연금술의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다.
멀티미디어의 기원이라 칭해지는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정원>은 작가의 창작의 산실이자 곧 유토피아인 것이다. 마샬 맥루헌이 인류 문명을 이끌었던 두 개의 개념 축으로 ‘바퀴와 회로circuit’를 언급했다. 뒤샹과 백남준은 그것을 대표하는 운영자였다. 이웅철은 디지털 도구를 사용해 두 가지를 사용하는 화로를 발명했다. “나는 발견했다”라는 뜻의 ‘유레카’에서 온 단어가 휴리스틱이다. 이웅철은 컴퓨터의 ‘휴리스틱 알고리즘’을 이용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현실과 가상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른다. 그의 예술 안에서 마법과 과학은 하나이다.
“마나가 다 떨어지면 꺼져가는 촛불처럼 문명이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마법도, 마법을 기반으로 한 산업도 없어진다. 그러면 인간이 자연을 강압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때까지 전 세계는 야만인이 지배할 것이고, 결국 저주받은 멍청한 검객들이 승리할 것이다.” - 워록
지구행성
실제로 화로는 내화벽돌을 삼단(우주의 질서)으로 쌓고 증류와 연소를 위한 구멍들과 굴뚝이 있는 복합적인 형태이다. 3D 프린팅은 매우 가느다란 플라스틱 필라멘트의 선들이 적층 되므로 현미경으로 보면 내화벽돌을 쌓은 것과 유사하다. 마법사가 세계를 탄생시켰던 생명의 기운이 화로 안에 떠 있으며 그 기운이 원소의 혼돈 상태를 질서 있고 합리적인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 발밑에 그 자체의 세계가 위대한 생명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노발리스)
19세기 소설가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지구를 향한 시적 열망으로 석탄, 광물, 귀중한 물질에 대한 문을 열었고 그 과정에서 지구는 자원이 되었다. 지구는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의 거대한 수조이다. 이웅철은 PLA를 재료로 해서 만든 3D 프린팅 오브제를 수조에 넣은 작품 <섬 속의 섬, 2020>을 만들었다. 섭씨 58도 이하에서 녹지 않는 이 PLA가 바다에 쌓여 있는 모습이 기후 변화로 녹아내리는 북극해의 빙하를 연상시키는 서글픈 농담의 작업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구의 자연적 순환을 바꾸고 있다. 우리는 인류세에 진입했다. 인간성에 주도된 새로운 지질학적인 시대epoch 안으로 들어갔다. 코로나가 만연한 시기에 제작된 이웅철의 PLA 수조 작품은 극단적인 기상 이변과 빙하 융해가 빈번해진 지구 행성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화석 연료를 태우는 인간은 새로운 화석을 더 많이 더 빨리 확보하려 한다. 당장은 아니라 해도 아주 가까운 훗날의 지질학자들은 육지와 바다 밑의 암석 지층에서 화석들을 발견하고 읽어낼 것이다. 도너 해러웨이가 <곤경과 더불어 살기>에서 우려한 대로 “화염에 싸인 숲 대신에 인류세를 향한 아이콘은 ‘불타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말은 무용수의 몸에 불을 붙여 촬영한 뒤에 영상 그래픽으로 제작한 이웅철의 <원형 기억, 2022>을 미래의 관점에서 읽어내게 한다.
<전망>
이웅철의 가장 최근의 전시 프로젝트인 <검은 돌과 다리미>(중동에서 노동자 부친이 가져온 사물들)는 한 교회를 개조해 실험적인 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열렸다. 영상, 설치, 문학(시), 안무, 사운드가 결합된 복합 매체 작품이었다. 주제는 전적으로 재생에너지만을 이용하는 역사상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인 ‘네옴 시티’에 대한 응답의 성격으로 전시장 내부에는 아시바 구조체가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텔스기가 살상을 범한 장소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걸프만의 바닷가에서 사막으로 이어지는 서울 면적의 44배에 달하는 초대형 신도시의 건설 사업 가운데 중심인 [the LINE]을 상징한다. ‘더 라인’이라는 열사의 대지 위에 초유의 태양에너지의 반사체로 세워지는 믿기 어려운 현실의 성채.
이웅철의 부친은 한국이 중동의 연이은 전쟁으로 경제성장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기회를 제공한 ‘중동 특수’가 지속되던 1980년대에 이란, 사우디의 파견 노동자로 장기간 근무하여 이웅철 작가에게 중동의 여러 환경은 어린 시절부터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 이상의 낯설지 않은 기억의 나라였고, 석유 자원을 둘러싼 걸프 전쟁과 세계 금융 센터 폭격이라는 9.11 테러는 작가로 데뷔하면서 지구촌 세상을 중동과 세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게 해주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의 미디어 예술이 상상적으로 도약하여 신화적 이야기와 기술이 통합하여 형상화를 이루는데 유익한 단서를 제공한 것은 SF 장르와의 만남이었다는 점이다. 무대를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대형 영상은 태양 폭풍이 인류의 우주 기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지구상에 몰고 올 수 있는 위험한 자연재해를 암시하며 시작한다. 태양 폭풍은 인공위성을 무력화시키고 통신을 방해할 뿐 아니라, 전력망을 차단하고 항공기의 비행 통제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전시 개막일 공연에서 안무가는 전시장에 놓인 아시바 구조체 안에서 걷고 오르고 매달리며 빠져나올 비상구를 찾다가 추락하는 ‘최후의 인간’을 연기한다. 메타 및 기타 플랫폼에서 사이버 세계가 생겨났지만 전쟁, 혁명, 기후 변화로 인해 무력화될 수 있는 물리적 구조에 의존한다. 가상 환경을 만든 기술은 결코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터넷 연결이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거나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지하실에 숨어 있거나 홍수와 가뭄으로 발이 묶인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으로 이동할 수 없다. 사이버 공간 자체는 평화와 안전의 영역도 아니다. 그 안에는 전쟁과 범죄가 만연해 있다. 물질적 인프라는 에너지 집약적이기 때문에 가상 영역은 천연자원의 통제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메타버스는 인간 세계를 투영한 것이지 인간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지정학의 부활과 함께 지구가 인간 사건의 결정적 요인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1997년 2회 광주비엔날레의 기획이 문화의 세계화라는 관점 보다 지구가 위기 국면에 빠진 상황의 점검에 손을 내밀었던 것을 당시 한국미술계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현대의 자만심이다. 인류세는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인류의 지위에 의문이 제기되는 순간에 다름 아니다.
나가며: <동요하는 걸음>
인적이 없는 바다의 갯벌에서 갈매기가 걷는 첫 장면에서 시작해 원거리에서 공중 촬영한 시점 안에 들어온 한 인물(작가 자신)이 바다를 향해 보통 속도의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인적이 없는 바닷가 해변을 배경으로 제작된 이 영상은 ‘보이지 않는’ 드론에 장착된 카메라가 촬영했다. 아무런 연출이 없이 평범해 보이는 반복적인 걷기가 갯벌에서 펼쳐지는데, 인물은 양쪽 발이 간신히 디딜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새의 발가락에서 착안한 삼각형의 블록 두 개를 번갈아 잇대어 사용해 가며 갯벌을 밟지 않은 채 오로지 그 블록으로만 이동해 나간다. 그는 이 블록을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인적이 없는 이 해변에서 작가가 새의 발걸음으로 매우 힘겹게 바다로 나가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 장소(선감도)는 이웅철이 경기 창작 센터의 작가 거주 프로그램에 참가해 그 위치가 1942년 소년 강제 수용소였던 선감학원이 문을 열었던 곳으로(사진; 첫 번째 원생들이 대부도 진두포구에 도착한 모습) 지금은 단지 지명으로만 남아 있는 섬이다. 선감도는 1980년대 간척 사업이 진행되면서 북과 남쪽으로는 다른 섬과 연결되어 섬으로써의 정체성이 사라졌다. 이제는 선감도 어디를 가도 간척 사업 이전에 존재했던 섬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렵다. 선감학원은 일제 총독부가 '빈민가 소년들과 고아들을 강제로 집단 수용'해 '태평양 전쟁을 위한 인적 자원을 충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강제 수용소였다. 이 시설은 1982년까지 존치되었고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에 시설 규모가 더 커졌다. 조국 해방이 선감학원까지 해방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부랑아로 낙인이 찍힌 아이들이 계속 그곳에 끌려갔다. 그중에는 부모도 있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경찰들이 단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간 결과다. 아이들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의 이름이나 나이를 제멋대로 바꿔 기록한 탓에 부모가 아이들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곳에 갇힌 아이들은 일제 시대만큼이나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매일 낮과 밤, 강제 노동과 폭행에 시달렸다. 그들은 지옥을 경험했고 일부 아이들은 한밤중에 탈출을 시도하다 밀물에 의해 익사했다. 작가는 수감된 아이가 되어 새처럼 자유를 찾아 날아가고 싶은 충동의 퍼포먼스를 하였다. 이웅철은 이 퍼포먼스 후에 블록을 더 많이 만들어 빈 거리에 그 블록을 깔고 퍼포먼스를 재연했다. 사라진 선감도를 ‘섬 속의 섬’(2020년 개인전의 전시 타이틀, 장소는 경기만 에코뮤지엄 「면, 사무소」)으로 재인식하는 관점에서 역사적 기억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그 영상을 통해 지중해를 건너 신세계라는 또 다른 나라로 탈주해야 하는 난민의 발걸음을 생각하면서 벼랑에 몰린 인류의 사고를 바깥의 시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지구를 태양계의 외로운 푸른 점에 비유하며 우주라는 바다의 작은 해변에 비유했다. 인간은 그 해변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함께 노력하며 잃어버린 근육의 쓰임을 다시 찾는 노력이 더 필요할 뿐이다.
<동요하는 걸음, 2019>은 그의 최초 영상 작품인 <안무; 드로잉과 설계 사이, 2018>와 더불어 ‘걷기’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살아가는 환경은 각각의 특정한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고 생활 속에서 무언가 불편함을 인식한다면 그 장소나 물건의 체계에 압박을 느꼈거나 적합한 행동양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엔 순종적으로 길들여졌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작동원리는 비단 물건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집단의 시스템 안에서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 점을 <안무; 드로잉과 설계 사이>에서 감동적으로 일깨워 주었다면 <동요하는 걸음>은 인간이 처한 현재의 위기를 알려주는 ‘카산드라’의 절규에 가깝다.
다음은 전시 이전에 작가와 한 대담이다.(2023. 10. 31)
(대담)
이영철의 Q & A
Q(이영철): 당신이 해온 가장 초기의 작업이 무엇이죠. 미디어 아트를 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A(이웅철): 공식적으로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작품 <무감각의 병리>라는 연작을 초기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도 이미지를 해체한 부조 작업으로 평면의 이미지를 추상화된 입체로 변환하는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손으로 만들던 과정에서 컴퓨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코로나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무래도 실내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컴퓨터 툴을 연구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형식이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Q. 사진의 사용이 어떤 점에서 마음에 들었나요. 현존하는 사물만을 다루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3D 스캐닝은 아주 작은 단위로 물질을 분쇄하여 재구성하는 기술인데 그것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나요.
A. 사진이나 영상은 기계를 사용하는데 기계는 눈, 귀, 손 등 신체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호의 세계에 살다 보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나 초기 작업부터 들여다보면 제 작업 방식에서 다소 환원주의적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기호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D 스캐닝은 사물을 디지털화하는 과정입니다. 석고로 캐스팅하는 것처럼 사물의 정보를 정보로 기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기술은 이미 산업이나 의료현장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라질 것들을 3차원 정보로 기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Q.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인 위너는 이 아날로지의 또 다른 핵심 아이디어로 이어졌습니다. 사이버네틱스의 세 번째 핵심 아이디어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대공 예측기 프로젝트에서 적군 조종사는 1941년 초 MIT 팀이 이미 지적했듯이 폭격기와 하나의 실체를 형성하여 "서보 기계처럼"(네거티브 피드백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전기를 정밀하게 제어된 동작으로 변환하는 전자기 장치) 행동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서보 메커니즘을 형성한 것은 비행기와 조종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대공포조차도 엔트로피 증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여러 명의 조종사와 복잡한 기계장치로 구성된 '동적 시스템'으로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에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Q. 미디어가 전제하는 소통에 대한 강박에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나요. 소통은 대부분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말하는데, 인간을 소거하는 척하는 인간적 행위, 담론, 그런 작업은 기만일까요.
A. 어느 기술이 그렇듯 미디어 또한 양면적 특성이 존재합니다.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페이스북 같은 사례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 미디어가 전제하는 소통에 적극적이진 않아서 그러한 강박은 없는 편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기호를 벗어나는 일이 어려운 것처럼 미술 활동을 포함해서 인간이 하는 활동이 인간 중심 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당신은 기계와 몸이 하나가 되는 선에 매일 좀 더 가까워지는 사람이 아닌가요. 아주 빠른 속도에 집중하여 이미지를 선택하고 자르고 붙이고 입히고 색을 바꾸어 배치하는 등의 행위가 혼자서 어려운 전쟁을 치르거나 낯선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주지를 만드는 새로운 원시인을 떠올리기도 해요. 허공에 그물을 치는 거미 같은 동물이 되는 느낌일까요. 사물들과 도구들이 행위 하는 주체가 되어 움직일 때 작가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수동적인 노동자인가요. 작가가 몰두하여 매체와 재료들에 빠져드는 순간들의 지속 안에서 다른 무언가로 변하게 되죠. 우린 카프카의 동물로 사는 게 아닌가요. 당신은 작업할 때 어떤가요.
A. 기계와 몸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안경이나 렌즈를 끼고 생활한 시점부터 이미 사이보그화된 것 같아요. 조각을 만들 때 샌딩기로 샌딩을 하고 있으면 마치 기계와 하나가 되어 내 몸 전체가 사포 기계가 된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는 데스크톱이나 노트북만이 컴퓨터가 아니라 휴대폰, 카메라, 자동차, 전자레인지 등 거의 모든 기계에 컴퓨터가 존재해서 주체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강한 AI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히 수동화되진 않았지만 점차 수동화 되어가고 있다는 긴장감은 느낍니다.
Q. 그 긴장은 당연해 보입니다. 기계가 몸 안에 들어와 스스로 작동하지 않을 테니까요. 단백질과 핵산이 아니라 규소와 게르마늄으로 만들어진 피조물(기계)에 대해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과 혐오감이죠. 하지만 인류의 생존은 이러한 원시적인 쇼비니즘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의 부정맥의 미세한 이상 기미를 감지하는 심박 조율기를 몸 안에 넣고 사는 사람의 경우라면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그 기계에 대해 분노하는 상황을 상상하긴 어려워요. 더 지적이고 정교한 기계들이 몸에 있게 된다면 지적 기계를 비인간적인 부분이라 따로 구분해 말하긴 어렵겠지요. 스위치는 시냅스에, 전선은 신경에, 네트워크는 신경계에, 12개의 센서는 눈과 귀에, 액추에이터는 근육에 해당하는 등 위너는 기계를 의인화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는 인간 생리를 이해하기 위해 기계와 비교하여 인간을 기계화하기도 했습니다.
Q. 오늘날 우리는 명령 체계를 따르고 익숙해지고 그것으로 나를 표현하는 것에 신체가 길들여지는 경험을 거의 누구나 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을 시사하나요. 특히 영상 작업은 누구나 알다시피 운영 체계를 이해하고 사용법에 철저히 익숙해지는 것을 말해요. ‘작동operation'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다른 매체의 그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A. 교복을 입고 줄을 맞춰선 순간 이미 명령 체계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었기에 사회에 나와서 제아무리 노력한들 그러한 과거에서 벗어난 신체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컴퓨터 영상은 그림처럼 허구의 이미지입니다.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영상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보다 그림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적인 CG도 극사실주의 회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초기부터 사용한 매트 페인팅 기법이 현대에 와서 CG로 옮겨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Q. 언젠가 작가는 빌 비올라 영상 작품에서 흥미를 느꼈다고 한 적이 있어요. <물> <불>이라는 그의 초기 비디오 영상 작품이 내가 총기획했던 97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하랄트 제만이 만든 ‘속도’ 파트에서 처음 보여졌어요. 사람의 신체가 물과 불의 연결로 사라지는 영상이 대중들에게 신선함과 충격을 부여했어요.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든 순수한 발견이든 놀라움은 인간의 놀이와 직결되지요. 작가에게 있어 놀라움은 무엇인가요.
A. 저에게 빌 비올라 작품이 주었던 놀라움은 관객들이 작품들을 보면서 ‘스탕달 신드롬’(단순히 예술 작품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일종의 엑스터시 상태에 빠지는 상태) 같은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밋밋한 스크린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원소를 다루는 것에서 오는 스펙터클, 배우들의 연기, 슬로모션에서 오는 비일상적인 이미지 등이 요소로 작동했고 그것이 합쳐질 때 관객이 받는 영적인 느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비올라가 소개된 비엔날레는 지구적인 것과 행성적인 것(음양오행은 하늘이 준 선물로 동아시아 고대인들의 자연 철학이었다)의 관계를 성찰하는 ‘인류세’에 대한 근래의 관심에 앞서 예술가들의 개념적, 정치적 카토그라피를 그리는 전시였어요. 그것은 한국 미술에 새로운 개념적 전환을 가져온 기점이기도 하죠. 90년대 작가들에게 개념이 공통의 전략적 술어가 되었다면 또한 비디오, 컴퓨터를 사용한 기계 매체는 시간을 기록하고 저장하고 표지하는 핵심어인데, ’작동operation'이 당신의 예술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일시 정지pause'는 날아가는 화살을 잡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A. 최근엔 ‘슬로 모션’ 대신 ‘불릿 타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날아가는 화살과도 연관되네요. ‘불릿 타임’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자주 등장했는데 정지에 가까운 느린 속도로 움직이지만 카메라는 빠르게 회전합니다. 이는 대상과 카메라의 시공간을 분리시킵니다. 작가들은 자연스럽게 최신의 툴을 다루게 되고 그러다 보면 하나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입니다. 비슷한 툴을 다루면 시공간 또한 유사성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앞서 언급한 수동적인 역할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기술에 경도되면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될 것입니다.
Q. 당신의 작업 구상과 기본 도구 속에 위상학적 추상성이 내재되어 있고, 지금까지 기하학과의 특권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를 다루면서 형태에 대한 관심이 ‘형태 생성’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군요. ‘형태 생성’은 정보의 값과 프로세스를 입력하는 것이니까요. 간단한 예로 스크린에 맺힌 액체 형상이 허공에서 유령처럼 움직이는군요. 전통적인 CAD와 달리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로 위상학적 추상성을 다루는 높은 기술과 감각입니다. 관점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관심과 비전을 말해줄 수 있을까요.
A. 조각을 영상화하는 나의 작업에서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를 잠시 파고들어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팬데믹)의 관심은 허버트 리드가 헨리 무어의 조각을 설명할 때 ‘마나mana'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에 흥미를 가졌는데 ‘마나’는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 일대에서 동양의 ‘기’와 같은 영적인 에너지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SF 소설가인 래리 니븐이 소설에서 마법에 사용하는 힘으로 명시하며 판타지 장르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경우지요. 이후 이러한 마나의 형태는 유체(Fluid)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러한 형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툴에서 유체역학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기능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며 느끼게 된 것은 ’파티클 노이즈‘를 다루면 자연현상을 모방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노이즈는 웨이브와도 관계가 있는데 입자와 파동의 형태를 잘 다루면 그 안에서 액체와 기체, 플라스마 등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함수를 만지면 생성하는 형상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데 마치 액션페인팅처럼 마우스로 클릭하여 뿌려주는 역할만 하면 형상은 자동으로 완성이 됩니다. 이러한 연습을 하며 구상과 추상,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술 밖에 있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표현 영역이 확장되는 부분에 있어서 충분히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그 경험이 미술 일반의 창조 과정을 피드백하여 창작의 신체 심리적 메커니즘을 새롭게 사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한 개의 검은 돌과 번쩍이는 은빛의 비계(scaffold)는 입자의 폭풍 속에서 강렬한 느낌을 주는군요. 밖에서 날아든 운석 같기도 하고 퇴적암 덩어리 같기도 하네요. 허공에 던져진 동물 뼛조각이 우주선으로 바뀌는 영화의 장면(스페이스 오디세이)은 지구를 먼 시간으로 돌아가 행성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죠.
A.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사막과 같은 황량한 풍경에서 시작합니다. 그 외 많은 SF 영화나 소설의 영향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만들어도 유사한 장면이 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전 SF 장르에서 등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전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도 이미 SF라는 생각이 듭니다.
Q.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비물질에 대한 고찰(<비물질>전, 퐁피두센터,1985)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기술이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실제로 변화시켰으며, 이러한 변화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디지털 기술로 생산 및/또는 처리된 것(따라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 범주에 속할 수 있는 기술)을 포함한 '비물질'이 조각과 그것의 물질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궁금해지게 마련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물질)과의 관계가 (비물질)과의 관계를 마찬가지로 조절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도 변경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상호 역학 관계에 관한 좀 더 작가적 입장이 궁금합니다.
A. 최근 비물질적인 조각들과 오히려 물질성을 강조하는 조각들, 그리고 양쪽을 아우르는 조각들 등 조각은 더욱 다양화되는 경향으로 보입니다. 이는 비물질의 세태에 따른 변화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를 넘어 제너러티브 아트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디지털 조각의 연장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비물질이 정신, 관념, 에너지와 같은 것일지라도 물질과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닌 평행한 관계이기에 생기는 현상일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대적 현상입니다.
Q. 다소 엉뚱한 질문 같지만 디지털 조각이 현대 한국 조각의 죽음을 재생시키거나 혹은 죽음을 지켰다고 보나요?
A. 이전 답변처럼 디지털 조각은 어딘가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비록 그 형식이 완전히 달라 보일지라도)이전 미술의 과정 속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양식은 늘 이전의 방식을 부수고 나오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늘 지연시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Q. 몰입력이 강한 영상 작품에서 흔히 ’아시바‘로 불리는 임시 구조체가 새로운 도시 문명의 출구 혹은 재앙의 상징처럼 느껴지네요. 그것은 모든 종류의 건설, 철거 프로젝트 및 일반 인프라 유지 보수를 위해 세계 어디서나 매일 세워지고 해체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사물이죠. 또한 해양 시추 및 탐사 리그, 공장, 영화 스튜디오, 무대 및 극장 세트, 스포츠와 문화 이벤트, 항공 우주 시설을 포함해 거의 모든 산업에 쓰입니다. 이 사물은 지구의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도래할 더 광범위한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며 ’작동‘하는 미디어 행동주의에 대한 암시가 느껴지는데, 당신의 미디어 아트는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만나나요.
첫 전시에서 <Dark polygon>시리즈는 초기 스텔스기인 F-117A를 해체한 형태의 부조 작업이었어요. 이 비행체의 목적은 기체의 행적을 들키지 않으며 전략적 임무를 수행하는 거죠. 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며, 영향력을 행세하는 고대의 신들과 유사성을 지닙니다. 또한 스텔스기의 정보 교란 능력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양상의 띄고 있어요. 당신이 스텔스기를 해체한 형상 작업을 한 것은 스캐폴딩의 조립과 해체와도 암묵적으로 연결된다고도 여겨지는군요.
A. 이번 작품의 모티브가 된 <네옴시티>는 한국의 시점에서 보면 과거 한국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불과 몇 십 년 전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데 건축의 규모와 왕권을 생각하면 몇 천년 전의 피라미드나 만리장성과도 연결됩니다. 물론 바벨탑과도 연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결국 관점의 차이인데 비인간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더 깊은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시점이 역사가들에게 다뤄지진 않지만 SF 문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져왔습니다.
Q. 당신의 디지털 작업은 스크린 위의 위상 도형을 다룹니다. 그것의 정체성은 연속성에 의해 정의됩니다. 잘라내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멍을 뚫으면 예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가진 구를 가지고 구멍을 뚫으면 원환이나 타이어 모양이 됩니다. 원환을 비틀고 돌리고 늘리고 압축하여 커피 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형태의 집단이 살고 있는 다른 위상 공간을 드나드는, 커피 컵과 타이어 사이를 드나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혹은 그 마법 클래스에 속한 멤버들과 함께 놀면서 새로운 다중의 특이한 공간으로 빠져들죠. 위험하지 않나요. 작업하는 순간에 당신의 동료들은 누구인가요. 그것들을 계속 빨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연속체입니다. 이런 발견, 호기심이 처음에 어디에서 동기를 부여받은 것인가요.
A. 앞에서 언급한 부분들과 이어지는데요. 툴을 연구한다는 것은 놀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 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생각해 보면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을 접했을 때 그 속도와 자극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어린 시절 컴퓨터 화면보호기가 뜨면 항상 넋을 놓고 보고 있었습니다. 스크린 세이버는 모니터의 번인(burn in) 현상을 막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니터 구석구석에 여러 가지 색상의 면과 선으로 지나가줘야 합니다. 기능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이미지 안으로 빠져든 셈인데 어찌 보면 지금의 작업들이 위치와 형태를 변화하며 리듬감을 띠는 화면보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네요.
Q. 오늘날 미디어의 개념에 수정이 일어나고 있어요. 인간의 역사 안으로 지질학의 ‘깊은 시간deep time'이 개입되어 있음을 생각하면서 벌어지는 일인 거죠. 이런 관점으로 인해 미디어의 역사는 고고학적인 지질 연대라는 시간 여행을 하게 되고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태어나기 이전인 4백만 년, 심지어 수십억 년 전의 광물의 기억과 만나게 됩니다. 그동안 당신의 작업의 변화와 그것이 다루는 시간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까요.
A. 그러한 시간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인간이 만드는 형상의 원형을 파고드는 작업을 통해 먼 과거로 이어지는 이미지를 탐구해왔습니다. 광물이나 자연현상을 다루는 작업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러한 작업들을 왜 했는지 생각해 보면 당시 작업실의 환경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기도 대부도에서 약 3년간 생활을 했는데 그곳은 섬을 개간하여 인공적인 환경을 구성한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현상은 그대로인데 갯벌이나 조류, 그리고 서해이기 때문에 노을이 질 때 모든 환경이 단색으로 보이는 장면들을 수시로 체험하며 지금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행성으로 인식되는 순간이 자주 있었어요. 그러한 환경에 있으면서 작업의 관심사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아,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미디어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미디어 자체에 선행하는 물질적 현실, 즉 지구의 역사, 지질 구조, 광물, 에너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근래의 새로운 연구 주제가 된 것으로 보여요. 근대화 이후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념과 무관하게 인간이 이제 자신의 집을 먹어치우기 시작한 거라는 표현이 너무 극단적일까요.
A. 중국에서 전해지는 괴물인 탐처럼 말이죠. 탐은 결국 태양까지 먹으려다 입안이 구워져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거주지인데요. 인간의 생을 넘어서는 거주환경이 만들어지는데 정작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은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민이나 나라가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복잡하지만 결국 그러한 이유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결국 인간 중심 세계에서는 인간보다 사물만이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업도 과도한 거주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막대한 광물과 에너지, 대지, 인력자원으로 만들어지는 도시는 그 자체로 살아있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원이 요구될 것입니다.
Q.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 사회가 유지되려면 희토류 광물과 기타 많은 재료가 디지털 미디어 기계가 작동하는 데 계속해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채취하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위험하고 착취적인 노동 과정이 뒤따르고, 그런 기계제품의 사용 후 폐기된 디지털 문화의 쓰레기가 지구에 남아 독성 폐기물의 층이 쌓이게 되는 점 등을 미디어 아트가 다루지 못했어요. 네트워크와 소통, 문화 담론에 집중했었으니까. 미디어의 고고학에 포함되는 이슈인가요. 아니면 별개의 영역을 설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A. 그와 관련하여 제가 본 작품들은 주로 다큐멘터리처럼 장소와 상황을 다루는 작업들이었어요.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로 월성 원전에서 오염수가 새어 나오고 있는데 그러한 당면 현실에 비해 볼 때, 그 강도가 강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이슈는 언론이나 SNS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고 과학자들의 노력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기후나 환경에 대한 이슈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번 작업에서는 이러한 고민들을 광대한 역사에 대한 상상력과 현실의 이야기를 혼합하여 풀어가려고 했습니다.